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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의 두얼굴, 보도연맹 양민 학살

     

     

     

     

    민간인 학살만을 놓고 본다면 이민족 지배하의 학살에 비해 동족 내 '빨갱이 사냥'이 규모나 강도에서 훨씬 잔혹했다.

    - 출처 : 「대한민국사」 1권 中

     

    보도연맹이란?

     

    1948년 일어났던 여순사건과 제주 4.3사건 이후 이승만 정부는 좌익에 부역했던 사람들의 반공단체인 보도(保導:보호하고 인도한다)연맹을 만든다.

    1949년 반공검사 오제도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보도연맹은 이른바 좌익운동 전향자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전과를 묻지 않는다며 조직한 단체이다.

    보도연맹의 할당이 각 지역 마다 주어지자 지역 관리자들은 배고픔으로 굶주려 있던 양민들에게 보리와 쌀을 나눠주며 이 연맹에 가입하도록 유도한 후 손도장을 찍게 한다.

    이승만의 두얼굴, 보도연맹 양민 학살 사건, 경북 고령군 조두규 맹원증 434번으로 미루어 보아 고령군 연맹원은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출처:한겨래

     

     

     

     

     

    6.25 전쟁과 보도연맹 양민 학살 사건

     

    이렇게 만들어진 보도연맹 명단은 이듬 해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예상치못한 방향으로 양민들을 몰아간다.

    이승만 정부는 내부의 좌익들이 북에 조력할 수 있다는 판단, 이 과정에서 전국의 보도연맹원들이 육군, 헌병, 경찰, 특히 우익청년단원 『서북청년회』 등에 의해 소집, 연행, 구금된 이후 집단 학살된다.

    가해세력에는 미군도 포함되어 있다.

    연구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당시 전국적으로 약 30~4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들은 1999년 미국 기밀해제로 들어난 일부 사진들로 모두 미 극동부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 소속 애버트 소령이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당시 거의 모든 사진은 이 미군 소령이 찍은 사진이다.

     

    이승만의 두얼굴, 보도연맹 양민 학살 사건

     

    상부에서 처단 명령이 하달되자 각 지역에서는 집합 장소로 보도연맹원들을 모조리 경찰서로 구금 후 일부는 교도소로 보내고, 일부는 개인적 친분이나 뇌물로 석방, 이승만과 같은 이씨 종친이라는 이유로 석방된다.

    그 중 석방되지 못한 나머지 양민들은 군경이 유치장이나 마을 창고에 가두어 놓고 차례대로 트럭에 실어 각 고을의 야산이나 선상에서 총살된다.

    이승만의 두얼굴, 보도연맹 양민 학살 사건

     

     

    이승만의 부산으로 피난과 보도연맹 양민 학살 사건

     

     

     

    1950년 6월 하순부터 시작된 학살은 이승만정부의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과 함께 지역별로 뚜렷히 나타난다.

    경기, 강원도를 시작으로 삼남지역(충청, 전라도, 경상도)으로 내려갔고, 형무소가 있었던 지역(대전, 공주, 전주, 목포, 진주, 대구 등)에서는 국군과 경찰이 후퇴하기 직전 재소자와 보도연맹 양민을 댜량 학살 후 낙동강 아래쪽으로 후퇴했다.

     

    간혹 몇몇 지역 관리자나 경찰 중 양민의 희생을 막은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그들의 죽음이 그 댓가였다.

    이승만의 두얼굴, 보도연맹 양민 학살 사건

     

    당시 학살당한 양민들의 시신은 제대로 순장되지 못한 채 일부는 해류를 따라 일본 해안으로 흘러 가기도 했는데 실제 시신들의 발견이 일본 신문에 실리기도 했고, 이들의 시신은 일본에 안장되어 이들을 위한 합장묘소도 만들어졌음이 확인됐다.

     

    이승만의 두얼굴, 보도연맹 양민 학살 사건, 출처 : 나무위키(좌,중)

     

     

     

     

    보도연맹 양민 학살 사건의 종결

     

    1950년 내내 한반도 전국에서 일어난 '보도연맹 양민 학살 사건'의 종결은 정부의 변심도, 미국의 개입도 아닌 '항미원조'를 내세운 중공군의 '인해전술' 때문이었다.

    1950년 10월 이후 수차례 중공군은 수십만의 병원을 동원해 국군 및 유엔군과 격돌했고 서울을 빼앗기고 되찾는 우여곡절을 겪자 전쟁에 동원되는 국군의 수가 턱없이 부족해졌다.

    이에 유엔군 사령관의 지도 아래 국군의 대규모 개편이 이루어 지면서 국군의 확충이 필요해지자 좌익 '빨갱이'든 우익 '애국청년단'이든 모두 최전방으로 끌려가 전쟁에 소모되면서 1951년 자연스럽게 학살은 종결된다.

     

    4.19 혁명 이후 진상조사 그러나...

     

    1960년 4.19 혁명 직후 전국에서 '보도연맹 양민 학살' 희생자의 유족들의 분노와 여론이 들끓자 제4대 국회(제2공화국)는 '양민학살 사건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여 가장 많이 학살당한 경상북도, 경상남도 등 학살현장의 실태조사를 시작한다.

    각 지역에서 합동위령제가 올려지고 장면 총리는 보도연맹 양민 학살 희생자들에 조화와 부조금을 보내 조의를 표한다.

    그러나 1961년 5.16 쿠테타는 희생자들과 혈육의 유골을 수습한 유족들을 '빨갱이'로 몰아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는다.

    이른바 '혁명재판'을 열어 '군인에게 학살된 일이 불법이기는 하나 이렇게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것은 북한을 이롭게 한다'기괴한 논리를 내세웠다.

     

    이승만의 두얼굴, 보도연맹 양민 학살 사건

     

    박정희의 군사독재 정권은 '보도연맹 양민 학살'의 유족에게 연좌제를 적용해 신원조회에 활용하는 등 인권침해를 지속적으로 해왔다. 

    연좌제는 유족까지 피해자로 만들었고 사회생활에서 신원조회로 감시 및 각종 불이익을 당하게 함으로써 경제적으로 곤궁에 빠지면서 더욱 고통을 가중시켰다.

    군사정권은 연좌제 외에도 유족회 활동 금지, 실형 선고로 유족들의 분노를 두려움으로 바꾸었고 정부는 기록을 모두 소각

    하는 등 진상을 철저하게 은폐, 금기했다.

    이렇게 '보도연맹 양민 학살'은 묻혀버린다.

     

     

    진상규명

     

     

     

     

     

    1987년, 전두환의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운동인 6월항쟁이 종결되면서 서서히 '보도연맹 양민 학살 사건'이 드러나게 된다.

    처음에는 민간단체가 나선 유해발굴 이었지만 2005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의 제정으로 2007년 5월부터 국가가 주도하게 된다.

    2006년 12월 154곳, 2010년 추가 14곳으로 매장 추정지를 선정한 후 기록과 주민들의 증언을 참조하여 우선 발굴 대상지를 39곳으로 압축했지만 실제 발굴이 이루어 진 곳은 경산 코발트광산, 충북 청원 분터골 등 13곳에 그친다.

    2010년 12월 31일 위원회 해산을 끝으로 매장 추정지의 7.7%, 우선 발굴 대상지의 33%만 발굴이 이뤄진 채 모든 활동은 멈춘 상태이다.

     

    이승만의 두얼굴, 보도연맹 양민 학살

     

     

    '보도연맹 양민 학살 사건'의 공식적 사망자는 4,934명이지만 추산되는 사망자는 30~40만 명 이상 이다.

    좀 더 정확한 조사를 진행하고자 했지만 시간이 많이 흘렀고, 군사정권이 관련 기록을 없앤 까닭에 제대로된 조사는 힘들었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로 부터 '빨갱이'라 낙인이 찍힌 유족들이 또 다시 정권이 바뀌었을 때 희생자 유족에서 '빨갱이'라는 멍애를 지고 살아갈 자신이 없어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2012년 대법원 판결

     

    2011년 6월 30일, '울산 보도연맹 양민 학살 사건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냈으나 고등법원에서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있는 국가가 진실을 은폐하여 원고들이 소송을 제기할 기회 자체를 박탈했기 때문에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다" 라는 법률해석으로 이 판결을 파기하고 고등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이는 2012년 대법원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이 났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 그 이후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58년 만에 최초로 국가를 대표해 당시 국가에 희생된 국민들의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죄하였다.

    참여정부 이전 정권은 이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기 바빴고, 심지어 민간인 처형자 명단을 3급 기밀로 분류해 학자들과 유족들의 진상 규명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이후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은 당시 처분에 대해 재심을 청구, 2020년 2월 14일 재판부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호응하는 등 이적 행위를 했다는 증거가 없어, 범죄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해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이는 학살 사건 이후 약 70년 만의 일이다.

     

     

    영화와 만화에서 보는 '보도연맹 양민 학살'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에 이 사건이 배경으로 나온다.

    이진태(장동건)의 약혼녀인 김영신(이은주)이 보리쌀 한 되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6.25전쟁 와중 청년단장(김수로)이 이끄는 반공청년단에게 끌려가 총살당한다.

     

    이승만의 두얼굴, 보도연맹 양민 학살 / 출처 :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 中

     

     

    이승만의 두얼굴, 보도연맹 양민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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